21세기의 종교 - 근대사회의 종교의 역할- 길희성

서구 근대사는 정신사적으로 볼 때 초월의 실종, 초월의 붕괴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라는 기반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탈(脫)기독교의 역사이다. 서구 문명이 이로 인해 초래된 정신적 충격과 공허를 완전히 극복하고 새로운 정신적 기반을 찾았는지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서구 문명은 기독교라는 보호자가 사라진 공백이 가져다 준 자유와 무한한 가능성을 즐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히 열린 자유의 공간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타율에서 자율로, 신앙에서 이성으로의 전환이 시작된 이래 서구 사회와 문화는 정치, 경제, 학문, 사상, 교육, 예술 등 삶의 제분야를 아우르는 하나의 통합적 기반을 상실한 채 삶의 각 영역이 파편화된 자율적 발전의 길을 걷고 있다. 이른바 사회와 문화의 세속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문화는 이제 더 이상 초월적 지향성이나 형이상학적 기반을 필요로 하지 않고 거부한 자리에 이성을 앉혔으며, 신적 계시에 대한 신앙을 인간 이성에 대한 신앙으로 대체했다. 하지만 이성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낙관주의에서 시작한 근대 서구 문호는 이미 19세기로 들어서면서부터 이성과 자유의 역설성에 봉착하게 된다. 해방적 이성이 억압적 이성으로 작용하고 독단적인 종교적 근본주의를 대신하여 편협한 세속적 근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옥죄게 된 것이다. 보편성과 획일성을 강요하는 근대적 이성은 모든 신화와 전통, 개별성과 특수성, 우연성과 역사성, 그리고 질적인 석과 가치론적인 것, 감정과 정열 등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타당한 인식의 영역에서 추방해 버렸다.

근대적 이성은 전통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했지만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라는 물음에는 확실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한 채 자유를 위한 자유의 공허성에 시달리게 된다. 신을 대체하여 인간 이성에서 새로운 삶의 기반을 찾고자 했던 근대성은 그 혁혁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회의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이렇다고 물론 이성이 포기된 것은 아니다. 통제력을 상실한 과학적 이성, 도구적 이성은 여전히 제 갈 길을 가면서 생활 세계를 속속 지배해 가고 있으나, 정작 그것을 통해 추구될 목표와 가치는 합리적 논의와 해결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극도의 개인주의와 타산적 상업주의로 인해 공동체는 해체되며, 획일적이고 계량화된 사고는 삶의 질고 깊이를 앗아가기에 이른 것이다.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되고 모든 끈에서 풀려난 개인들은 소속감과 방향 감각을 잃고 방황한다. 한마디로 말해, 현대인은 신든 이성이든 삶의 궁극적 기반에 대한 신앙을 상실한 채 망망한 자유의 바다 속에서 어딘가에 자신의 삶을 정착시키고자 온갖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온갖 감각주의, 쾌락주의, 배금주의, 물신 숭배 등이 횡행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근대 서구가 봉착한 심각한 정신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모든 사회와 문화들이 근대 서구의 전철을 숙명과도 같이 되풀이하고 있다. 물론 아시아 -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서구의 전통 사회와는 달리 기독교 대신 다른 종교 전통들을 삶의 궁극적 기반으로 삼고 살아왔다. 그러나 이들 나라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결같이 서구적 근대화와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세속적 이성이 지니고 있는 해방적 힘의 매력이 작용하고 있다. 전통의 권위에 대한 맹목적 순종을 강요당해 온 모든 전통 사회의 사람들에게 서구의 세속적 이성은 확실히 해방적 복음으로 다가온 것이 사실이다. 서구 이성이 보여 준 양면성 가운데 적어도 그 비판적, 해방적 힘은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사회, 모든 문호가 서구의 전철을 그대로 밟으라는 법은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여하튼 이제 한국을 비롯한 많은 전통 사회들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서구식 세속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은 전통적 삶의 기반과 의미를 상실한 채 방황하게 되었다. 지성인들은 전통으로부터 유리되거나 소외되어 자신들이 속했던 전통을 단지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으며, 전통 문화는 이제 관광 상품 이상의 가치를 지니기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고 서구인들은 삶을 지탱해 주고 있는 세속적 합리주의가 우리에게 제대로 자리잡은 것도 아니다. 특수한 관행과 관습으로 삶을 지배하던 전통 사회의 윤리는 허물어지고 있으나 그 것을 대신해서 개인의 합리성과 자율성에 근거한 시민 사회적 보편 윤리가 정착된 것도 아니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반인륜적인 범죄 행위 역시 적지 않게 이 같은 상황에 기인한다.

오늘날 한국인을 하나로 묶어 주는 이념이 있다면 그 것은 근대사의 격랑 속에서 서구로부터 받아들인 자유민주주의일 것이다. 자유와 평등의 이념 아래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는 다양한 종교들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면서 각기 자기 길을 가도록 해주는 유일한 체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자체의 도그마와 폐쇄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자유 민주주의는 분명 인류가 낳은 이념 가운데서 다원 사회를 위한 가장 적합한 이념이요 체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 그 자체는 결코 전통적 종교를 대신하여 삶의 궁극적 기반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유교적 신앙은 붕괴되어 그 외피적 관습만 남아 있고, 그것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형이상학적 신앙은 아직 없고, 그렇다고 우리에게 세속적 합리주의나 휴머니즘이 내면화되어 정착된 것도 아니다. 현대 한국인의 정신적 방황, 한국 사회의 도덕적 혼란과 문화적 혼잡성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상황에 기인하는 것이다.